초여름 볕에 데워진 기름진 땅 기사 곁에 초겨울 물가의 여린 풀꽃 을해가 뿌리를 내린 그림이에요. 나무가 흙을 파고드는 사이라 기사는 을해 앞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고, 배우자 자리의 뱀(사)과 돼지(해)는 여름 불과 겨울 물만큼 온도가 달라 정면으로 마주 서는 자리(사해충)에 놓여요. 둘 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쪽이라 편안한데, 그래서 정작 자기 속마음을 먼저 꺼내는 사람이 없는 조합이에요.
만나면 끌리는 점
기사에게 을해는 나를 다잡게 하는 사람이라, 기사는 을해 앞에서 평소보다 한 번 더 살피고 더 정성껏 챙기게 돼요. 풀꽃은 작고 가늘어도 뿌리가 의외로 질겨서 땅도 함부로 대하지 못해요. 을해에게 기사는 크게 품어 주고 싶은 사람이라, 뿌리를 깊이 내려 볼 만한 넓은 땅 같은 기사 곁에서는 조심스럽던 을해도 어깨에서 힘을 빼요.
배우자 자리로 내려오면 기사는 을해의 돼지 앞에서 조심조심 보살피게 돼요. 을해가 말을 고르는 동안 기사는 을해가 힘들다고 흘린 날짜를 기억해 두었다가 필요한 것을 먼저 건네요. 을해는 기사의 뱀 앞에서 생각이 말로 풀려나와서, 서운하다는 말이 늦게 나오던 을해도 기사 앞에서는 하루 이야기를 먼저 풀어놓기 쉬워요.
부딪히기 쉬운 점
두 사람은 상대의 하루를 먼저 묻는 사람들이라, ‘오늘 어땠어?’로 시작한 대화가 서로의 안부를 되묻다 끝나기 쉬워요. 기사는 자신의 서운함을 뒤늦게 꺼내고 을해는 서운하다는 말이 늦게 나와서, 그날 밤 대화에는 누구의 속마음도 오르지 않아요. 며칠 뒤 한 사람이 ‘사실 그때…’ 하고 꺼내면 상대는 이미 지나간 일로 알고 있어서 놀라요.
부딪히는 자리는 초여름 열을 품은 뱀(사)과 초겨울 물을 건너는 돼지(해)가 마주 선 모양이라 연락의 온도에서 먼저 드러나요. 을해의 연락이 뜸해지면 기사는 걱정 섞인 ‘피곤한가?’를 먼저 보내는데, 지난 대화를 돌아보며 이유를 찾는 중인 을해에게는 그 질문이 답을 재촉하는 소리로 들려 말이 더 막혀요.
연애할 때
기사는 을해가 지난주에 말한 발표 이야기를 기억해 두었다가 ‘그 발표 어떻게 됐어?’ 하고 먼저 물어요. 대답 뒤에 숨은 마음까지 듣고 싶어 하는 을해는 자기 이야기를 담아 두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고 그제야 마음을 열어요.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을 드디어 만났다는 안도가 이 연애의 시작이에요.
연락이 뜸해지면 을해는 바로 따지지 않고 지난 대화를 처음부터 되짚어 이유를 찾고, 기사는 짧은 답장 하나에도 ‘피곤한가?’ 하고 먼저 물어요. 질문이 쌓일수록 을해가 대답할 말은 더 멀어지니, 기사가 하루 한 번 안부만 묻고 나머지는 점심 사진이나 날씨 한마디처럼 답이 필요 없는 메시지로 채우면 을해가 숨 쉴 틈이 생겨요.
결혼하면
같이 살면 기사는 집 안 물건의 자리와 떨어진 소모품을 기억하는 담당이 되고, 을해는 퇴근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하루를 물어 주는 담당이 되기 쉬워요. 집 안이 따뜻하게 돌아가는 구조지만 둘 다 자기 피곤을 뒤로 미루는 사람이라, 집안일의 몫이 한쪽으로 쏠려도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
서운함이 늦게 나오는 부부라서 ‘서운한 건 사흘 안에 한 줄로 말하기’ 같은 작은 약속을 만들어 두면 좋아요. 한 줄이면 충분하다는 규칙이 있으면 기사는 뒤늦게 꺼내는 부담이, 을해는 이유를 다 찾은 뒤에야 말하려는 부담이 함께 줄어요.
헤어진 뒤 다시 만난다면
다시 만난다면 기사가 먼저 ‘잘 지냈어?’ 하고 안부를 건네고, 을해는 그 사이 지난 대화를 몇 번이고 돌아보며 이유를 정리해 둔 상태로 답하기 쉬워요. 그래서 을해의 첫 대답은 기사가 예상한 것보다 길고 구체적이에요.
재회한 날에는 두 사람이 서로 ‘너는 어땠어?’만 주고받다 헤어지기 쉬워서, 한 사람이 먼저 자기 근황을 길게 이야기하는 역할을 번갈아 맡는 쪽이 좋아요. 첫 만남은 기사가, 두 번째 만남은 을해가 말하는 쪽에 서면 뱀과 돼지 사이의 온도 차가 한결 줄어요.